문화의 세기라고 하는 오늘날, 인간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적인 삶을 살고 있다. 문화는 사회가 구성되는 핵심적인 차원이 되었으며 그 범위뿐아니라 영향력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문화’ 개념은 경제 및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오늘날 문화는 지역적, 민족적, 젠더적, 세대적 정체성을 수단으로 삼는 정체성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인종적 종교적 갈등 및 국제사회 질서와 관련하여 문화는 다원주의라는 새로운 관계와 문제들과 직면하고 있다.

우리 삶의 기본적인 관계와 조건들, 제도들이 일상적 삶의 과정에서 수행되는 상징적 행위들을 통해 구성되고 있다는 인식은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0세기 이후 문화연구의 범위는 예술을 넘어 정치, 종교, 경제의 영역으로 확대되었으며 문화 연구는 예술이론뿐 아니라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종교 역시 교리나 사상보다 상징과 의미체계로서 이해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상징과 의미체계는 양변에 머문다. 불교에서 양변은 고통과 집착의 원천이므로 오직 양변을 여읜 ‘중도(majjhimā patipadā)’만 열반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중도는 한편으로 ‘양변을 여읜다’는 점에서 상징과 의미체계에서 벗어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와 그 구체적 실천방법으로서 제시된 팔정도는 가치지향적이다. 이런 특별한 용도의 의미체계를 불교에서는 ‘방편’이라고 부른다.

문화는 라캉이 말한 바 대타자로서 우리 삶을 구성하지만 실재가 아닌 이름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상징계’에 속한다. 반면 ‘열반’, ‘깨달음’은 일상적 삶을 구성하는 의미와 상징으로 파악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다.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실재계’에 속한다. 결코 실재가 될 수 없는 문화에게 불교가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가 있다면 그것은 방편이다. 실재는 아니지만 실재를 향하는 길로서 방편은 잠정적이지만 유의미한 가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지구적인 교류 증가는 서로 다른 상징체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문화권 사이의 이해를 증가시키기보다 충돌과 갈등,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다원성, 차이, 다양성, 주변성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시야를 확대시키고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도 했지만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라는 미명 아래 갈등을 분산시키고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 결과, 극우 민족주의와 근본주의 종교가 다시 횡행하고 도덕과 인간 보편의 가치에 대한 무정부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 냉소가 번지고 있다.

자기 삶에 대해 느끼는 의미는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느낌, 삶이 살만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며 궁극적으로 현실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도덕적 무정부주의와 허무주의적 냉소를 극복하기 위해 과거의 이분법적 의미체계로의 회귀가 해결책은 아니다. 양변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감각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교에서 말한 ‘방편’으로서의 중도다. 에드워드 홀이 말한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얽어매는 문화적 습관을 자각하고 새로운 습관을 개발하는 자발성을 갖출 때, 인간은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될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며 그가 가진 탁월성을 입증하게 된다. 나아가 문화적 가상, 즉 상징계를 벗어나 실재로 나아가게 된다. 수행도로서 중도는 현대문화의 다종다양성에 의해 초래된 의미의 부재, 가치의 상실을 해결하고 문화의 차원을 실재로 고양하는 길이다.